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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 당하던 촌놈이 ‘웨딩 재벌’ 됐어요”

함박웃슴가득 2010. 1. 19. 19:41

“왕따 당하던 촌놈이 ‘웨딩 재벌’ 됐어요”

김병수 토토인베스트먼트 부회장

이코노믹리뷰 | 박영환 | 입력 2010.01.19

김병수 부회장이 기억하는 유년 시절은 희뿌연 잿빛이다. 급우들은 허름한 복장의 시골 전학생을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밥도 사주고, 구슬치기도 일부러 져줬지만 환심을 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다 가난 때문인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그는 '서울행' 열차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영세업자들이 몰려 있는 성수동은 을씨년스러웠다. 가위를 만드는 '프레스공장'에서 꼬박 한 달 반을 일한 그는 '오뎅'을 그때 처음 먹어보았다.

"지금도 그 아부레기(오뎅) 맛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 김 부회장의 회고다. 좁은 골방에서 잠을 청하면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양친의 손에 이끌려 낙향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해군'에 입대했다. 사방이 꽉 막힌 시기였다.

그런 그에게 '비상(飛上)'의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해군 본부에 근무할 때였다. 그는 틈틈이 사촌형 내외가 운영하던 '식당'에 들러 '일손'을 부지런히 도왔다. 그를 눈여겨보던 사촌형은 제대를 한 그에게 '호프집'을 하나 차려주었다.

그의 첫번째 도전은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린다. 상권 분석도, 고객 기호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그는 예식장 식당 운영에 뛰어든 사촌형 내외를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예식장 부설 식당사업에 덜컥 뛰어들었다. 그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고 당시를 떠올린다.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누는 하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예식장 운영의 '감'을 익히던 시절이다.

청담동 '탑 웨딩홀' 인수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친척들까지 총동원해 자금을 확보했다. 홍콩, 싱가포르, 일본 웨딩산업을 보고 돌아온 그는 장(張)의자를 식장에 도입한다.

일본식 하우스 웨딩문화를 도입한 최초의 예식장이라는 입소문이 금방 퍼져나갔다. 그는 입소문의 위력을 그때 절감했다고 고백한다. 탑 웨딩홀을 인수하기 전에 다녀온 해외 투어는 늘 영감의 원천이었다.

김 부회장은 "공부는 못했어도 젊은이들의 마음만큼은 기막히게 잘 읽었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부동산투자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예식장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서울 동작동에 매물로 나온 시가 40억원짜리 빌라(140평형)를 절반 값인 20억원에 매입했다.

1990년 말 외환위기를 전후한 시기였다. "어렸을 때 하도 가난하게 살다 보니 무조건 큰 집을 사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이다. 김 부회장은 양친을 모실 요량이 아니었다면, 강남에 집을 사두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작동의 고급 빌라는 IMF 이후 급등하면서 막대한 시세차익을 안겨주었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예식장을 함께 운영하던 친구가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 최대의 위기였다. 김 부회장은 "차용증 하나를 써주고 30억원을 빌려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린다.

사촌형 내외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1년간을 묵묵히 일하며 몸에 익은 진솔하고 뚝배기 같은 태도가 위기 때 그를 구한 자산이었다. 그는 '보증수표'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학교 졸업식날 가출했던 산골소년은 국내에서 가장 큰예식장을 운영하는 웨딩홀 재벌이 되었다. 김 부회장은 자신의 성공비결로 무엇보다 사람을 보는 '안목(眼目)'을 꼽는다.

대한민국 최대 '예식장' 경영에 성공
지난 10일 오후 2시30분, 서울 고속터미널에 위치한 강남 웨딩홀에서는 한 쌍의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이 예식장이 공모한 수기에 당선돼 무료 결혼식을 올리는 행운을 잡은 주인공들이다. 김병수 부회장은 좋은 일도 하고, 예식장도 알리고 싶었다고 귀뜸한다. 강남고속터미널 주식회사 소유의 이 웨딩홀은 골칫거리였다.

'터미널'의 입지 여건이 걸림돌이었다. '혼주'들은 대개 유년 시절 지저분하고 부랑자들이 들끓던 버스터미널의 아득한 풍경을 떠올렸다. 그는 지난 2007년 '강남 웨딩홀'을 맡았다.

이 예식장에 투입한 자금은 무려 70억원. 강남고속터미널 5층 전체를 연면적 3000평 규모의 예식장으로 리모델링했다. 식당 홀의 규모가 크다 보니 홀 곳곳으로 손님들을 실어나르는 '자동차'도 비치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학교 졸업식날 가출을 했던 산골 소년은 국내에서 가장 큰 예식장을 운영하는 웨딩홀 재벌이 되었다.

이 예식장을 포함해 모두 3개의 예식장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요즘 《2010 트렌드》를 읽고 있다며 귀뜸을 한다.

기회는 늘 출렁이며, 그 흐름만 제대로 포착해도 재부의 기회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김 부회장은 자신의 성공비결로 무엇보다 사람을 보는 '안목(眼目)'을 꼽는다. 가난한 시절에는 조변석개하는 세상의 인심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받은 '홀대'는 기억의 저편에서 지금도 불쑥 고개를 내민다. 부자가 된 이후에는 돈을 노리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지금까지 떼인 돈만 수억 원은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김 부회장은 하지만 이제는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상대방 목소리만 듣고도 진의를 파악할 정도가 됐다.

값비싼 수업료의 대가를 톡톡히 보상받고 있다는 김 부회장은 요즘 새로운 사업 기회를 엿보고 있다.

식당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웨딩홀을 운영하게 된 그는 특급호텔 인수에도 관심이 많다.

그가 자신의 선택에 늘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김 부회장은 "주요 결정을 보완해 줄 '장자방'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더 큰 '부'를 만들 수 있지 않았겠냐"는 아쉬움도 피력한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로 재미를 본 적이 있으나, 그가 가장 믿는 것은 여전히 땅이다. 그는 "지적도를 보면 물소리. 새소리가 들릴 정도로 땅을 공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난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한 김 부회장은 지난 1996년 서울산업대에 입학하는 등 만학의 열정도 불태우고 있다.

등심·햄버거 스테이크 대중화에 나서자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에피소드도 털어놓는다. 물량을 꾸준히 공급받을 수 없는 품목이어서 대중화가 어렵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김 부회장은 한 달에 자가용 기름값으로만 60만원 이상을 쓴다고 한다. 자가용에 몸을 실으면 고향 산천의 풍광이 기억을 비집고 나온다. 가난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김 부회장이 유년 시절 살던 마을은 전라도 나주의 산간벽촌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가구 수도 20여세대에 불과했다. 수업을 마치고 가축들에게 먹일 '꼴'을 부지런히 나르다 보면 하루 해는 금방 저물었다. 주리고 헐벗었던 유년기 풍경이 지금은 아름답게만 느껴진다고 그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